며칠 전부터 해외 AI 커뮤니티에서 정체불명의 모델 하나가 조용히 화제가 됐습니다.
이름은 Ox Alpha(牛来).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OpenRouter와 OpenCode 같은 글로벌 AI 플랫폼에서 순식간에 1위를 차지했고, 심지어 DeepSeek이 56일 동안 지켜온 OpenCode 1위 자리를 단번에 빼앗아버렸습니다.
해외 개발자들은 “이게 대체 어디서 나온 모델이야?”라며 혈안이 됐었는데요, 마침내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바로 중국 AI 스타트업 즈푸(Zhipu AI)가 개발한 GLM-5.3 Flash였습니다.
더 놀라운 건, 이 모델이 처리한 수십조 건의 요청이 전부 중국산 반도체(국산 칩) 위에서 돌아갔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중국 AI가 또 잘 만들었네”로 넘기기엔, 이번 이야기는 좀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체불명 ‘Ox Alpha’, 알고 보니 중국 AI
GLM-5.3 Flash가 공개되기 전, 즈푸는 이 모델을 ‘Ox Alpha’라는 익명으로 먼저 글로벌 플랫폼에 올렸습니다. 회사 이름도, 출처도 없이 그냥 모델 하나만 올라온 거죠. 그런데 해외 개발자들이 써보더니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OpenRouter에서는 출시 첫날 단일 일 토큰(Token) 사용량 역대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고, OpenCode에서는 DeepSeek이 56일 연속으로 지키던 1위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이 수치가 역대 최고를 찍었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써봤다는 뜻입니다.
한 블로거는 같은 명령어(Prompt)로 며칠 간격을 두고 두 번 테스트를 해봤는데, 두 번째 결과가 첫 번째보다 훨씬 나아진 것을 보고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 모델은 스스로 계속 학습하는 것 같다.”
즈푸가 공식적으로 “이게 우리 모델입니다”라고 밝힌 뒤에야,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달 넘게 열심히 쓰던 모델이 중국산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것도 중국산 칩으로 돌아가는.
GLM-5.3 Flash, 실제로 뭘 할 수 있나
즈푸 GLM-5.3 Flash의 가장 큰 특징은 GLM 시리즈 최초의 네이티브 멀티모달 모델이라는 점입니다. 멀티모달이란 텍스트뿐 아니라 이미지, 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동시에 이해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기존 AI들이 텍스트만 잘 읽었다면, 이제는 영상도 보고, 그림도 보고, 거기에 맞춰 코드도 짜는 거죠.
실제 테스트 사례들을 보면 꽤 인상적입니다.
영상 자막 생성 – 누가 말하는지까지 구분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영상을 주고, 각 화자를 구분해서 색깔별 자막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말을 받아쓰는 게 아니라, 화면에 잠깐 등장한 명찰(이름표)을 스스로 포착해서 목소리와 얼굴, 이름을 연결하는 방식으로 처리했습니다. 화면을 ‘읽는’ 능력이 상당한 수준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영화 한 편을 통째로 분석해 해설 영상 제작
중국 영화 《신화》 전편을 입력하고, 주요 줄거리와 인물 관계를 정리해 해설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GLM-5.3 Flash는 전체 영화를 스스로 이해하고, 핵심 장면을 추려내고, 해설 내레이션과 자막까지 붙인 영상을 완성했습니다.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이해한 뒤 편집까지 한 셈입니다.
UI 디자인 시안 → 실제 작동하는 앱으로
쇼핑 앱의 디자인 시안 이미지 하나를 주고, 실제로 작동하는 모바일 앱 인터페이스를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홈 화면, 상품 목록, 장바구니, 결제, 주문 완료, 지도까지 — 디자인 시안에 담긴 거의 모든 기능을 실제로 작동하는 형태로 구현해냈습니다. 디자이너가 그린 그림을 보고 개발자가 코드를 짜는 과정을 AI 혼자 해낸 것입니다.
3D 모델링 12시간 자율 작업
즈푸 공식 발표에 따르면, GLM-5.3 Flash가 3D 그래픽 툴인 Blender를 이용해 12시간 동안 혼자 3D 장면을 구성하는 작업을 완수했습니다. 사람이 중간에 개입하지 않고, AI가 스스로 판단하며 장시간 작업을 이어간 것입니다.
320B인데 왜 이렇게 빠르고 저렴할까 — 구조의 비밀
GLM-5.3 Flash의 총 파라미터(매개변수, AI 모델의 ‘뇌세포’ 수에 해당)는 320B(3,200억 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 번에 활성화되는 파라미터는 18B(180억 개)에 불과합니다. 이전 세대인 GLM-5.2는 753B였는데, 그보다 훨씬 작은 구조로 오히려 더 높은 성능을 냈습니다.
비결은 선형 어텐션(Linear Attention) + 희소 어텐션(Sparse Attention) 혼합 구조에 있습니다.
어텐션(Attention)이란 AI가 문장이나 영상을 처리할 때 “어느 부분에 집중할지”를 결정하는 핵심 메커니즘입니다. 기존 방식은 모든 단어가 다른 모든 단어를 일일이 참조하는 방식이라 처리량이 많아질수록 계산 비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GLM-5.3 Flash는 이를 개선해, 가까운 정보는 선형 어텐션으로 빠르게 처리하고, 멀리 있는 중요한 정보는 가벼운 인덱서(색인기)를 통해 골라서 참조하는 방식을 씁니다. 여기에 IndexPool이라는 기술로 캐시(임시 저장 공간)를 4분의 1로 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전 모델 대비 어텐션 계산량은 3.01배 감소, KV 캐시는 4.44배 축소됐습니다.
또한 멀티모달 처리, 입력 사전 처리, 출력 생성을 각각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Encode-Prefill-Decode 분리 아키텍처를 도입해, 국산 칩 환경에서도 동일한 하드웨어 대비 서비스 성능을 3배 향상시켰습니다.
중국산 칩으로 전 세계 요청을 처리했다는 것의 의미
이번 GLM-5.3 Flash 공개에서 기술적 성능 못지않게 주목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Ox Alpha가 익명으로 전 세계 개발자들의 요청을 받아 처리하는 동안, 그 모든 연산이 중국산 반도체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즈푸는 이 사실을 공개하며 “62조(兆) 토큰이 전부 국산 칩에서 처리됐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AI 업계에서 엔비디아(NVIDIA) GPU는 사실상 표준 인프라입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AI 서비스를 운영하려면 엔비디아 칩이 필수라고 여겨질 정도죠. 그런데 즈푸는 국산 칩으로 글로벌 트래픽을 소화하면서, 단위 토큰당 비용도 엔비디아 GPU와 동등한 수준으로 맞췄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가 강화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자체 칩으로 최전선 AI 모델을 운영하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건 단순한 기술 뉴스가 아닙니다. 반도체 공급망과 AI 패권 경쟁이라는 큰 그림에서 봤을 때, 이 흐름은 꽤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신호입니다.
성능은 Claude Opus 4.8 수준, 가격은 1/40
GLM-5.3 Flash는 현재 글로벌 AI 모델 평가 지표인 AA 벤치마크에서 57점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앤트로픽(Anthropic)의 최상위 모델인 Claude Opus 4.8과 동일한 점수입니다. 그런데 가격은 Claude Opus 4.8의 1/40 수준입니다. 이전 세대인 GLM-5.3 대비로도 1/10 가격이고, 한시적 할인 기간에는 1/20까지 내려갑니다.
AI 에이전트가 실제 업무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한 번의 작업에 수십 분에서 수 시간이 걸리고 그만큼 토큰 비용이 쌓이는 문제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전선 수준의 성능을 훨씬 낮은 가격에 제공한다는 건, AI를 실제 업무에 도입하려는 기업들 입장에서 무시하기 어려운 조건입니다.
오픈소스로 전 세계에 공개 — ‘모델도, 칩도, 생태계도 우리 것’
GLM-5.3 Flash는 발표와 동시에 전 세계 오픈소스로 공개됐습니다. HuggingFace를 통해 모델 가중치(AI의 학습된 내용이 담긴 파일)를 누구나 내려받을 수 있고, ZCode와 오픈 API를 통해 바로 연동해 쓸 수도 있습니다.
즈푸가 이번에 보여준 그림은 이렇습니다. 최전선 성능의 AI 모델을 만들고, 그걸 국산 칩으로 돌리고, 다시 오픈소스로 풀어서 생태계를 넓힌다. 모델, 인프라, 생태계 세 가지가 처음으로 하나의 고리로 연결된 셈입니다.
‘牛来(우래)’라는 이름이 처음엔 그냥 재미있는 코드명처럼 보였지만, 즈푸가 정체를 밝히고 나서 보니 꽤 의미심장합니다. 중국어로 ‘소가 온다’는 뜻인데, 일 잘하고 먹는 것도 적은 소. 그리고 이번엔 소도 자기 것, 풀밭도 자기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중국 AI의 흐름이 단순히 “따라잡기”에서 “자체 생태계 구축”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이 흐름이 우리나라 AI 산업과 반도체 업계에 어떤 파장을 미칠지, 앞으로도 눈을 떼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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